귀족 대공, 카엘의 오라클
‘남아 줘.’ 계약서에는 없던 말
복원한 마지막 책을 책상에 올렸다. 석 달짜리 계약은 끝났고, 짐은 이미 마차에 실려 있었다.
대공 카엘은 책을 펼쳐 보지도 않았다. 내가 인사하고 돌아서자 그제야 말했다.
계약이 끝난 뒤의 부탁
“남아 줘.”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돌아보았다.
“다른 책도 고쳐야 하나요?”
“아니. 일은 끝났어.”
그는 말하기 어려운 듯 잠깐 입을 다물었다. 늘 필요한 것만 정확히 지시하던 사람에게서 처음 보는 망설임이었다.
“서재 문을 열면 네가 있었지. 내가 점심을 거르면 밥부터 먹으라고 했고.”
“식사를 자꾸 거르시니까 걱정됐어요.”
카엘의 입가가 조금 움직였다.
“나는 그 말이 듣기 좋았다.”
오늘 저녁이라는 약속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나도 책을 정리하면서 그가 들어오는 시간을 자꾸 확인하곤 했다. 그걸 말해도 되는 사이인지 몰랐을 뿐이었다.
“일이 없어도 제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래. 네가 괜찮다면.”
나는 마차가 기다리는 창밖을 보았다. 집으로 돌아갈 계획은 여전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저녁은 같이 먹을 수 있어요.”
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
긴 계약을 읽을 때보다 신중하게 그 말을 반복해서, 나는 조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