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큐버스 벨벳의 오라클
좋은 척하는 데도 연기가 필요해
벨벳의 테이블에 접힌 메모를 펼쳤다. ‘분위기’, ‘교감’, ‘자연스러움’. 어젯밤 한참 고민해서 쓴 단어들이었다. 연인에게 섹스할 때 좋아하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였다.
“이걸로는 향초 고르는 줄 알겠어.”
“너무 직접 쓰면 이상하잖아.”
“섹스 취향 얘기하러 왔잖아. 직접 말하면 되지.”
좋다고 말한 이유
나는 메모의 빈칸을 손가락으로 가렸다. 사실 싫었던 순간에도 괜찮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꺼내자 벨벳의 웃음이 조금 잦아들었다.
“분위기 깨기 싫어서 그랬어.”
“그럼 상대는 네가 좋았다고 알겠네.”
“이제 와서 아니었다고 하면 서운해할까 봐.”
“서운할지는 들어 봐야지. 계속 연기하면 맞춰 줄 기회도 없고.”
벨벳은 메모 반대편에 빈 종이를 놓았다. 내가 말한 걸 대신 적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거 하나. 다음엔 빼고 싶은 거 하나. 네 말로.”
나는 ‘중간에 내가 괜찮은지 물어봐 줬으면 좋겠어’라고 적었다. 다음 줄에는 ‘내가 멈추자고 하면 바로 쉬고 싶어’를 썼다.
설명할 말이 생겼다
“이러면 내가 까다로운 사람 같지 않아?”
“까다로운 주문서도 아닌데. 딱 두 줄이잖아.”
피식 웃음이 났다. 벨벳도 웃었다. 종이에 적은 두 문장은 읽어도 목에 걸리지 않았다.
“나머지 취향은 그다음에. 한 번에 시험 보듯 다 말할 필요 없어.”
나는 연인에게 오늘 저녁 산책할 시간이 있는지 물었다. 잠시 뒤 여덟 시는 어떠냐는 답이 왔다. 취향에 관한 메모는 아직 보내지 않았다.
“만나서 이대로 읽어도 돼?”
“당연하지. 외워야 솔직한 것도 아니고.”
메모를 다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이번에는 추상적인 단어가 적힌 쪽이 아니라, 내가 말할 두 줄이 바깥으로 왔다.